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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기행

고려청자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2021223()

 

 

[라이프칼럼] 고려청자

청자의 요람 월주요 장인들은 오월국이 멸망하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새로이 둥지를 튼 곳은 용천요와 경덕진요. 광종(光宗, 925~975)은 월주요 장인들을 고려로 부른다. 경기도 시흥시 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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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암각화·김치·태권도·금관·K-pop 등 문화상징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비색 청자가 두드러지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끈질긴 노력이 영롱하게 꽃피웠기 때문이다.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고려청자는 질그릇과 사기그릇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우리를 비색으로 질타한다."

최석호. 2021. "고려청자". <헤럴드경제> 라이프칼럼 2월 23일자

고려청자 제1기 - 청자순화4년명항아리

청자의 요람 월주요 장인들은 오월국이 멸망하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새로이 둥지르 튼 곳은 용천요와 경덕진요. 광종(光宗, 925~975)은 월주요 장인들을 고려로 부른다.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 등지에 40미터나 되는 벽돌가마(塼築窯)를 만들고 청자를 빚는다. 970년대로 추정하는 때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로 청자를 만든다. 이 무렵 청자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원산리에서 만든 청자순화4년명항아리’(靑瓷淳化4年銘壺). 중국식 벽돌가마에 월주요 장인들이 담갈색 청자유를 발라 만든 것으로 고려청자의 기원이다.

 

바로 이 항아리 덕분에 언제( 993) 청자를 처음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황해도 배천군 원산리 가마터) 만들었는지, 어떻게(테쌓기 기법으로 성형하여 녹갈색 반투명 청자유를 바르고 벽돌가마에서 구워서) 만들었는지, 어떤 용도(992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완성한 太廟 태조와 황후를 봉안한 第一室에서 사용한 향제기)로 사용했는지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2019년 보물 제237호에서 국보 제326호로 승격했다(신승운 외, 2019: 214~224).

 

고려 성종 13년 993년. 국보 제326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고려청자 제2기 - 비색청자

993년부터 1019년까지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서 침입한다. 개경이 불타고 현종(顯宗, 992~1031)은 나주로 피신한다. 청자를 아끼고 사랑했던 예종(16睿宗, 1079~1122)은 강진에 황실용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를 만든다. 고려청자 장인들은 길이를 20미터로 줄인 진흙가마를 만들고 재벌구이를 시도한다. 그야말로 비취옥 같은 녹청색 청자를 구워낸다(윤용이, 2007: 192~198). 월주요 청자 고비색(古秘色)을 훌쩍 뛰어 넘은 고려청자 비색(翡色)은 이렇게 탄생한다. 그 뒤로 고려에서는 청자라 부르지 않고 비색이라 부른다(徐兢, 2013: 37~42).

 

세 차례에 걸쳐 30년가량 계속 된 거란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무신세력이 성장한다. 고려청자는 선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누구라도 우람한 듯 유려하고 불안한 듯 치솟는 매병 곡선을 온 몸과 마음으로 감상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비색이 발색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청자 곡선은 상형의 극치를 보여준다(윤용이, 2007: 208~223).

고려청자 제3기 - 상감청자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정중부·이의방·이의민 등으로 계속 된 난을 겪은 뒤 최충헌 형제가 무신정권을 수립하면서 혼란을 수습한다. 공예태후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 인종(17仁宗, 1122~1146)으로부터 의종(18毅宗, 1127~1173)을 거쳐 명종(19明宗, 1131~1202)으로 황위를 이었던 그 시절 비색청자에서 상감청자(象嵌靑瓷)로 넘어간다. 비색 유조에서 곡선 상형을 거쳐 상감 회화로 이행하면서 고려청자는 절정에 이른다.

 

고려 인종 24년 1146년 인종 장릉 출토유물

11462월 정묘일 인종 황제가 보화전에서 승하하자 태자 현() 의종(재위 1146~1170)은 대관전에서 즉위한다. 인종(재위 1122~1146) 황제와 공예태후 임씨의 맏아들이다. 의종은 어머니 공예태후에게 효도를 다한 형에게 공효(恭孝)라는 시호와 인종(仁宗)이라는 묘호를 올린다. 3월 갑신일 장릉에 장사했다(金宗瑞·鄭麟趾, 2004: 749~755). 시호와 묘호를 적은 인종시책과 함께 청자 민무늬 참외모양 병’(靑瓷素文瓜形甁) 부장한다. 비색으로 찬란하다.

 

고려 인종 24년 1146년. 장릉 출토 국보 94호 ‘청자 민무늬 참외모양 병’(靑瓷素文瓜形甁) © 국립중앙박물관

철화기법으로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토끼 눈을 장식하고, 상형기법으로 연꽃 받침대를 만들고, 투각기법으로 입체감을 더한데다가, 투각 장식한 뚜껑 교차점을 상감기법으로 메운, 청자투각칠보문개향로’(靑瓷透刻七寶紋蓋香爐)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선언한다.

 

고려 12세기. 국보 제95호 ‘청자투각칠보문개향로’(靑瓷透刻七寶紋蓋香爐)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청자 제4기 - 상감청자 완성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에서 중국 장인의 기술을 바탕으로 시작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고려 장인의 손으로 비색을 구현했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고려화된 독창적인 청자를 완성한다. 기이한 형태와 유려한 곡선으로 고려 무인의 자주성을 화려하게 상감한다. 비취옥 비색에 유려한 곡선을 더하고 학과 구름을 상감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326 靑瓷象嵌雲鶴文梅甁)은 말과 글로는 그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절정을 보여준다.

고려 13세기.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 간송미술관

고려청자 제5기 - 분청자

14세기 고려청자는 다시 강진으로 요지를 옮긴 뒤 분청자로 넘어간다. 상감분청·인화분청·조화분청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면서 실용적인 생활도기로 자리잡는다.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가교로서 역할을 다하고 일상에서도 사라진다.

 

우리 민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암각화·김치·태권도·금관·K-pop 등 문화상징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비색 청자가 두드러지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끈질긴 노력이 영롱하게 꽃피웠기 때문이다.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고려청자는 질그릇과 사기그릇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우리를 비색으로 질타한다.

참고문헌

고유섭. 1977. 송도의 고적열화당.

고유섭. 2007. 우현 고유섭 전집 2 조선미술사 하 각론편열화당.

고유섭. 2010. 우현 고유섭 전집 5 - 고려청자열화당.

金宗瑞鄭麟趾. 2004(1451). 高麗史節要 上신서원.

徐兢. 2013(1124). 高麗圖經황소자리.

신승운 외. 2019. <1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자료> 문화재위원회.

윤용이. 2007.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돌베개.

정인지 외. 1997(1451). 高麗史 第2신서원.

조은정. 2020. 태평정과 양이정고려청자박물관.

최순우. 1967. “강진 사당리 요지 출토 고려청자전”. 미술사학연구8(12): 354~355.

 

최석호. 2021. "고려처청자". 2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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