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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기행

추사 김정희 - 궁했으므로 맑고 밝았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2019724()

 

지난 2010년쯤으로 기억한다. 전남 도청에서 근무하는 최석남 사무관의 간청에 못 이겨 남도를 찾았다. ‘강진에서 다산 정약용을 만나고 진도에서 소치 허련으로부터 4대를 거쳐 이어진 화맥을 감상하겠구나!’ 지레 짐작하고 나섰다. 생애 첫 남도행이다.

목포 성옥기념관

깜짝 놀랐다. 화순적벽 망미정에서 문곡 김수항이 쓴 시를, 물염적벽 물염정에서 농암 김창협이 쓴 시를, 송석정에서 삼연 김창흡이 쓴 시를 읽었다. 모두 화순에 있는 정자에 게액 되어 있는 시다. 목포에서는 더 놀랐다.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인생을 生涯一片靑山 淸明在窮”(생애일편청산 청명재궁)이라 표현한 두 폭 병풍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성옥기념관 제2 전시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포 성옥기념관

노완(老阮)이라 새긴 인장을 찍은 걸로 봐서 추사체를 완성한 뒤에 쓴 글씨가 분명하다. 추사의 당호가 완당(阮堂)이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인장 노완은 완당에서 추사 노인이 썼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추사는 자신의 생애를 청산(靑山)에 비유했다. 그런데 두 글자를 마치 한 글자처럼 썼다. 연이어서 써 놓으니 곧을 직()자와 매 한가지다. 곧고 푸른 인생이었다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가 쓴 이곡병

이어서 곧고 푸른 삶을 산 비결을 궁했으므로 청명, 즉 맑고 밝았다’(淸明在窮)는 데에서 찾는다. 1 12달을 둘로 쪼개면 24절기가 된다. 24절기 중 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곡우 등 8절기는 15일마다 한 번씩 120일 동안 차례로 온다. 8절기를 각각 셋으로 나누면 5일에 한 번씩 24절후가 차례로 온다. 5 1후마다 한 번씩 모두 스물네 번 바람이 분다. 그 바람 불 때 마다 새로운 꽃 하나씩 피어서 스물네 가지 꽃이 핀다. 그래서 꽃소식 바람, 花信風이라 한다. 청명(淸明)은 꽃 피는 8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다. 온 세상이 맑아지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더 없이 좋은 계절이다. 인생이 그와 같았다는 뜻이다.

 

추사영정(보물 547호 ©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는 1856년 10월 10일 과천 과지초당에서 생을 마쳤다. 이에 절친한 친구 권돈인(權敦仁 1793~1859)은 이듬해 초여름 관복을 입은 추사를 이한철(李漢喆 1808~80)에게 그리게 하고, 이를 예산 추사고택 뒤편에 세운 사당에 봉안했다. 권돈인은 ‘추사영실(秋史影室)’이란 현판을 썼고 화상찬(畵像贊)도 짓고 썼다.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궁즉독선기신 달즉겸선천하)

추사이곡병에서 핵심은 궁()이다. 추사는 경전에 나오지 않는 글은 잘 쓰지 않는다. 당연 경전 어디에선가 가져온 글에 자신의 인생을 빗대서 썼을 것이다. 그렇다. 맹자(孟子)가 송구천(宋句踐)에게 남들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덕과 의를 쌓아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일렀다(孟子 盡心章句 上 第9). 덕과 의를 쌓는 방법은 궁()한지 아니면 달()한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궁하면 자신을 착하게 하고, 달하면 백성까지 착한 데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덕과 의를 쌓아야 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추사 이곡병 "생애일편청산 청명재궁"(ⓒ 성옥기념관)

맹자는 선비()를 일컬어 궁이라 했고, 대부(大夫)를 일컬어 달이라 했다. 추사는 관직 에 나아가지 아니한 선비로, 즉 궁하게 살면서 이름을 깨끗하게 했다. ()의 뜻 몸 신()을 소리 활 궁() 뒤로 숨겨서 썼다. 순서를 바꾸어서 씀으로써 글자가 마치 추사의 얼굴처럼 보이게 했다. 글자를 그림으로 읽어 보면, 궁자는 영락없는 얼굴 옆모습이다. 갓머리는 상투다. 상투아래 눈섶은 양쪽 끝이 축 쳐졌다. 몸 신과 위치를 바꿔서 왼쪽 앞으로 나온 활 궁은 마치 수염처럼 둥글게 말려올랐다. 서귀포와 북청 유배를 오가는 사이 어느새 늙어버린 추사를 보는 듯하다. 형상미가 돋보인다.

 

글자 그 자체를 보면, 궁의 갓머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지붕 아래 오른쪽 담벼락을 길게 늘여서 썼다. 그 왼쪽 몸 신은 곧게 썼다. 몸 신 아래는 마치 양반 다리 같다. 제주에 위리안치 된 추사가 벽에 바짝 붙어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책을 읽고 있다. 궁한 선비다. 글자로 읽든, 그림으로 보든, 뜻으로 새기든,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는 매양 한가지다.

박물관 나들이

그 뒤로 틈만 나면 남도를 찾는다. 혼자 가기도 하고, 벗하여 가기도 하고, 걷기여행객들과 함께 하기도 한다. 또 다시 여름휴가다. 바다나 계곡도 좋다. 올해에는 전시관을 찾는 것이 어떨까?!

 

자녀들과 함께라면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이 좋겠다. 불과 15분 거리에 플레이도시가 있다. 춘천시 초입에 김유정문학촌에 들른 뒤 의암호를 한 바퀴 돌면 애니메이션박물관과 강원화목원으로 이어진다. 부산시는 예술로 물들었다. 부산문화회관에서는 마네·르누아르·고갱·고흐 등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빛의 화가들전을 열고 있다. 부산박물관에서는 제2회 신수유물전을 열어서 이야기가 있는 민화, 효자도를 보여주고 있다. 부산 영화의 전당 인생사진관에서는 영화의 전당 곳곳을 누비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 준다.

 

최석호 문화스포츠 칼럼. 2019. "궁했으므로 맑고 밝았다". <헤럴드경제> 7월 26일자 (ⓒ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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