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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기행

<연평초령의모도>

연평초령의모도 진위 논쟁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2021323()

 

 

[라이프칼럼] 연평초령의모도 진위논쟁

1748년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간 최북(毫生館 崔北, 1720~?)이 ‘연평초령의모도(延平 齡依母圖)’ 밑그림을 그린다. 1790년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는 이 밑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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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平髫齡依母圖

 

<연평초령의모도> 원경(遠景)은 일본 후지산이다. 중경(中景)에는 돔형 지붕과 석조 기둥이 많은 서양식 건물이 등장한다. 천주(泉州)에 있는 석조 이슬람사원 청정사와 흡사하다(신상웅, 2019: 100).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에는 돔형 지붕이나 석조 기둥이 없다. , 중경에 등장하는 건물은 일본 히라도에 있는 건물을 그린 것이 아니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이 살고 있는 중국 천주에 있는 건물이다. 건물 2층에 있는 정성공은 등을 돌리고 원경에 있는 후지산을 바라보고 있다.

 

<연평초령의모도> 1790년 박제가·나빙

그림 맨 위에 초순이 제기를 쓰고, 그림 왼쪽 위에 박제가도 제기를 썼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심수용(1832~1873) 인장을 찍었다. 연평(延平)은 명나라 황제가 정성공(鄭成功, 1624~1662)에게 내린 봉호. 초령(髫齡)은 젖니갈이를 하는 나이. 의모(依母)는 어머니에게 의지해서 산다는 뜻.

 

밑그림, 완성 그리고 소장

1748년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간 최북(毫生館 崔北, 1720~?)<延平髫齡依母圖> 밑그림을 그린다. 1790년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는 최북이 그린 밑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간다. 나빙(羅聘, 1733~1799)과 함께 <연평초령의모도>를 완성한다(신상웅, 2019: 72~81).

 

1820년 이전에 완원(芸臺 玩元, 1764~1849)의 셋째 아들 사경 완복(賜卿 阮福, 1801~1875)이 북경에서 이 그림을 손에 넣었다. 외삼촌 초순(理堂 焦循, 1763~1820)에게 보여주고 찬을 받는다. 1863년 심수용(均初 沈樹鏽, 1833~1873)이 구입하여 소장했다.

 

1933년 화상 에토(江濤)가 상해에서 구입하여 동경으로 가져간다. 1934년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가 소장했다(정민, 2014b: 149~151). 유엔대사를 지낸 한옥표 유엔한국협회 고문이 외교관으로 활동할 당시 공관에 늘 걸어놓았던 <연평초령의모도>19988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 <延平髫齡依母圖>는 일본에서 밑그림을 그리고, 중국에서 완성하여, 한국에서 소장하고 있다.

 

<연평초령의모도>는 박제가와 나빙의 합작품 김현영

나빙의 선조는 명나라 중기까지 살았던 안후이성(安徽省) 황산 아래 유서 깊은 마을 청칸(呈坎)을 떠나 장쑤성 양저우(江蘇省 揚州)로 이주했다. 번가원(樊家遠)이라고 불렀던 나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현재 양저우시립병원이 있는 곳이다. 나빙의 옛집도 근처에 있었다. 청나라 군대는 16454월 양저우까지 밀어닥친다. 투항을 거부하자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도륙한다. 번가원에 있었던 증조부 나인미는 급박한 상황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증조모 이씨와 동서들은 피난하지 못했다. 대신 번가원 누각 위에 올라 불을 놓았다. 시신 열세 구가 발견되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양저우의 10이라 부른다.

 

정성공은 일본에 있는 어머니에게 중국으로 건너오시라는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 다가와 마쓰(田川松)1645415일 일본에서 중국 취안저우(福建省 泉州) 남쪽 해안가 정씨집성촌 스징(石井)마을로 간다. 정성공이 22살 되던 해다. 모자는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정성공이 명나라 당왕(唐王 朱聿鍵)을 알현하자 당왕은 주()씨 성을 하사하고 성공(成功)이라 이름 지었다. 부마와 같이 대우한 것이다. 성과 본이 임금과 같아졌기에 사람들은 정성공을 국성공(國姓公)이라 불렀다. 치카마쓰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이 쓴 소설 國姓爺合戰(고쿠센야갓센)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가부키로도 만들어져 크게 유행한다. 이듬해 1646년 명나라 당왕은 남진하는 청군에 쫓겨 연평에서 정주로 옮겼다가 푸저우(福建省 福州)에서 죽음을 맞는다. 청군이 정씨집성촌이 있는 취안저우(福建省 泉州)에 다다르자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 마쓰(田川松)는 취안저우 성루에 올라 목을 찌르고 물에 빠져 자결한다(김현영, 2013: 119~125).

 

김현영. 2013.  《통신사, 동아시아를 잇다》 한국한중앙연구원출판부.

청군에게 어머니를 잃은 정성공은 난징 공자묘로 가서 유복(儒服)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는다. 정성공은 항청복명 최후의 보루가 된다. 청군에게 증조모를 잃은 나빙은 정성공과 그의 어머니 다가와를 그림으로 남긴다.

 

북학파 초정 박제가의 사상적 뿌리는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의 낙론(洛論)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학파의 고문이었던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은 석실서원에서 삼연 김창흡에게 배운다. 북학파의 종장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과 열혈 당인이었던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8~1807), 박제가(1750~1805) 등은 조선중화(朝鮮中華)를 계승한다. 북학파는 임진왜란의 아픔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오랑캐 청이라 할지라도 앞선 문물을 이루었다면 가서 배워야 한다(不恥下問). 청나라가 번역한 서양 과학기술 서적 신서(新書)를 들여와서 공부한다. 조선 선비들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임진년에 왜란을 당한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잊은 것은 아니다(최석호, 2018).

 

청에 대한 적개심과 한족의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나빙이다. 왜 오랑캐에게 짓밟힐 때 도와준 명에게 감사하고 청 오랑캐에게 당한 패배의 굴욕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박제가다. 두 사람은 정성공으로부터 접점을 찾는다. 유덕무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그림을 펼친다. 최북이 일본에서 그린 <연평초령의모도> 모본이다. 최북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가부키 <고쿠센야 갓센>(國姓爺合戰)에 대해서 알았을 것이다. <고쿠센야 갓센>은 중국인 정성공과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를 소재로 1715년 초연한 가부키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가부키 무대나 포스터로 그린 우키요에(부세화)를 통해서 서양건물을 접했을 것이다(김현영, 2013: 128). 의기투합한 나빙과 박제가는 힘을 합쳐 <연평초령의모도>를 완성한다.

 

<연평초령의모도>는 가짜 - 정민

20131021일 정민 교수는 이 그림을 직접 보고 세부를 촬영한다.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작 변증을 한다(정민, 2014b).

 

정민 . 2014b. “ 박제가  < 연평초령의모도 > 의 위작 변증 ”.  《 문헌과 해석 》  66: 148~169.

첫째, 연대가 맞지 않는다. 그림 상단에 초순이 찬한 제기에서 이르기를 이 족자는 사경 조카가 호부의 관직에 복무하고 있을 때 북경 집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초순은 사경 완복이 19살 때인 1820년에 세상을 떴다. 19살에 모든 것이 다 통과하고 호부 관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연평초령의모도> 초순 제기

둘째, 글씨가 가짜다. 초정이 찬한 그림 왼쪽 상단 제기 글씨도 박제가 글씨와 다르다. 그림 속 박제가의 글씨는 학자풍의 글씨도 아니지만 모두 졸렬하고 삐뚤빼뚤하다.

 

박제가 글씨. <연평초령의모도> 박제가 글씨(오른쪽 끝)

셋째, 인장도 모조품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인장 沈樹鏽同治紀元後所得에 등장하는 심수용은 청말 강남4대가로 불린 수장가 중 한 사람이다. 인장을 각한 사람은 조지겸이다. 청말 전각의 대가다. 趙之謙印譜에 동일한 인장이 있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연평초령의모도>에 있는 인장은 원본과 현격한 수준차가 있다.

 

<연평초령의모도> 심수용 인장(왼쪽). 《趙之謙印譜》 심수용 인장(오른쪽)

정민은 18세기 한중 지식인에 대한 전문연구자다. 박제가 문집 貞蕤閣集공역자 중 한 명이다. 이제 더 이상 <연평초령의모도>를 진작이라고 주장하기 힘들어졌다.

 

정민. 2014.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문학동네.

 

<연평초령의모도>는 진짜 - 신상웅

염색가 신상웅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일본 히라도·데지마, 우리나라 부여, 중국 북경·하문·천주 등을 두루 걷는다. 대만 안평과 대남을 걷지 않은 것은 아쉽다. 2019년 출간한 책에서 <연평초령의모도>는 진짜라고 주장(신상웅, 2019: 168~169)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완복은 호부 소관(小官)에 불과했다”(신상웅, 2019: 167~168)고 답한다. 말단 심부름꾼이니 10대 후반 나이에 할 만한 일이다.

 

초정이 쓴 글씨는 문제가 많다. 그렇지만 박제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문제다. 반청복명을 주도한 정성공은 그 이름만으로도 위험천만하다. 그래서 박제가는 자신이 쓴 글씨인 듯 아닌 듯 가볍게 붓을 놀렸다”(신상웅, 2019: 261~267). 역모에 휘말리게 될 때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안전장치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장은 가짜다. 이름난 수장가의 인장을 찍음으로써 그림 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다. 결국 위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신상웅 . 2019.  《1790 년 베이징  –  박제가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  마음산책 .

한국화 역사를 말하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연평초령의모도>에 대해서 정민이 2014년 논문을 발표하면서 위작(僞作) 변증을 한다. 일거에 역전된다. 그렇게 잊혀졌다. 신상웅이 그림과 관련된 사람들의 행적을 좇아 두 발로 걸었던 모든 이야기를 2019년 책으로 출간한다. 신상웅의 진작(眞作) 변증으로 <연평초령의모도>는 다시 살아난다.

 

그림 한 점에도 역사는 살아 숨 쉰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교과서 조작은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살아 숨 쉬어야 할 차례다.

 

참고문헌

김현영. 2013. “연평초령의모도, 동아시아를 바꾸다”. 통신사, 동아시아를 잇다한국학중앙연구원.

북경중앙미술학원 미술사계 중국미술사교연실 편. 1998.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박은화 역. 시공아트.

신상웅. 2019. 1790년 베이징 박제가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마음산책.

이홍식. 2011. “박제가와 나빙의 예술 교유”. 정민·김동준 외.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태학사.

일본사학회. 2011. 아틀라스 일본사사계절.

정민. 2014a.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정민. 2014b. “박제가 <연평초령의모도>의 위작 변증”. 문헌과 해석66: 148~169.

정옥자. 2012.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 조선사에서 법고창신의 길을 찾다돌베개.

주경철. 2003.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산처럼.

최석호. 2018. 골목길 역사산책 - 서울편시루.

翦伯贊. 1990. 中國全史 下학민글밭.

周婉窈. 2003.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신구문화사.

James Cahill. 2002. 중국회화사조선미 역. 열화당.

Jonathan Clements. 2008. 해적왕 정성공 중국의 아들 대만의 아버지삼우반.

藤塚鄰. 2008a. 秋史 金正喜 硏究 淸朝文化 東傳硏究과천문화원.

藤塚鄰. 2008b. “淸鮮 문화교류 연구의 동기 및 그 과정”. 추사 자료의 귀환과천문화원.

 

최석호. 2021. "연평초령의모도 진위논쟁". <헤럴드경제> 3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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