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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구락부

북리뷰 《인간 등정의 발자취》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94년이다. 그 즈음 나는 김용준 선생이 만든 독서클럽 회원으로 참여했다. 김용준 선생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텍사스A&M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구군부와 신군부로부터 각각 한 번씩 해직되었다. 은퇴하신 뒤 대우학술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학술지 과학과 철학을 편집하고 동생 김용옥 선생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김용준 선생

김용준 선생은 평생 과학과 종교에 매달렸다. 나에게 책 두 권을 읽으라고 했다.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와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가 쓴 인간 등정의 발자취가 바로 그 책이다. 2021년 나는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다시 읽었다. 그 동안 나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보다 나이가 많다. 그때와 달리 과학철학이나 사회과학방법론에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처음 읽었을 때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예리코에서 처음으로 밀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하비루를 이끌고 가는 도상에서 마주한 성이 에리코다. 성서에는 7일째 되는 날 하비루들이 함성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고 기록했다. 신화적인 기록이다. 당시로서는 우리가 요즘 글을 쓰고 기록하는 과학적 기술이나 역사적 기술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의문을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풀었다.

1973년 출간한 영어 초판 The Ascent of Man을 김은국이 번역하고 김용준 선생이 서문을 써서 1985년에 출간한 한국어 초판 《인간 등정의 발자취》에 출간했다. 

다시 읽은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고전이었다. 고전이라고 하면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많은 인사이트를 던져 주는 책을 말한다. 다만 시간이 고전이라고 할 만큼 흐르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10점 만점에 9점이라고 말한다. 영화에 평점을 줄 때 5점 만점에 5점은 많지 않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야만 줄 수 있는 점수이기 때문이다. 정말 잘 만든 영화에 줄 수 있는 점수는 기껏해야 4.5이나 4점이다. 고전이라고 할만큼 시간이 흐른 흑백영화나 5점을 받는다. 그래서 이 책은 9점이다. 그런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10점 만점을 주겠다.

우선, 지금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다. 초판이 나온 1973년에서 무려 거의 5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읽고 있다. 저자는 가고 없지만 책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된다.

다음으로, 다른 책이나 방송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총 균 쇠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은 인간 등정의 발자취와 매우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혜안이 돋보인다. 과학과 예술을 종합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이미 선진국 대학에 현실이 되었다. 분과 학문별로 나뉘어져 있던 것이 통합과학을 지향하고 있다. 엄격한 학과별 경계는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 브로노우스키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은 현실이다.

구체적인 시례를 들어보자. 브로노우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참 후에 보상이 주어지는 행동을 계획하는 능력은 연기반응(delayed response) 최고의 역작이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지연만족’(the postponement of gratificatio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의 두뇌가 가진 중요한 재능이며 동물의 두뇌에는 그에 해당하는 초보적인 것조차 없다. …… 여기서 나는 사회학자와는 다른 말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 충분한 지식을 쌓기 위해 결정하는 과정을 연기해야만 한다.”

브로노우스키 저서 한국어판 초판(1985) 및 재판(2016) 표지

만족의 지연은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이아스(Norber Elias)가 말하는 문명화과정론(Civilising Process)의 핵심 개념이다.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Civilising Process) 궁정사회(Court Society) 독일인(The German) 3부작을 통해서 인간은 문명화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독특한 행동을 하는 동물로 발달했다. 장기적인 전망에 따라서 현재 취할 행동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 경우 20% 수익을 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물건을 팔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물가가 상승한다면 몇 일 또는 몇 주 뒤에 내다 팔면 더 큰 이익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웃으면서 인사한다. 물론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 인사할 것이다. 감정을 숨기고 폭력을 자제하는 능력은 만족을 지연시킴으로써 더 큰 만족을 얻고자 하는 행동의 출발점이다. 반면에 동물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다. 만족을 지연시키는 문명화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문명화과정을 쓴 Norbert Elias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창조경영을 선언한 적이 있다. “마누라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라고 말하면서 창조경영 사례로 일본 아사히야마 동물원을 들었다. 브로노우스키는 왓슨과 크릭의 이중나선구조에서 상상력을 말한다. 창조경영에서 말하는 혁신을 넘어선 창조 아이디어는 브로노우스키가 말하는 상상력에 따라 좌우된다.

Creativity라는 책에서 Robert Weis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왓슨과 크릭은 분자의 모양이 나선모양이라고 가정했다. 라이너스 폴링이 알파-케라틴 단백질 구조를 결정하는 문제를 풀었는데, 알파-케라틴은 나선모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원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모형을 만들었다. DNA처럼 알파-케라틴은 커다란 유기분자, 즉 거대분자다. 단백질은 펩타이드라고 부르는 단위를 무수하게 반복해서 만든다. 따라서 단백질은 폴리펩타이드, 그러니까 DNA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 구조와 비슷하다. 왓슨과 크릭은 분자생물학자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폴링의 논문을 자신들의 연구에 기초로 삼았다. 왓슨과 크릭은 과거작업 위에서 작업을 사작한 것이다. 새로운 것은 옛것과 연속적이다. 이를 창조적 사고의 연속성이라 부른다. 1951년 여름 크릭이 카벤디시연구소 스태프로 합류했을 때, 윌킨스는 DNA가 나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빛에 반응하는 DNA의 속성을 연구하다가 실수로 DNA섬유를 만들었다. 연구조교가 그 섬유에 X선을 쪼였더니 회절패턴(diffraction pattern)을 얻었다. 왓슨은 열광했다.”

같은 캠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연구를 하고 있었던 Franklin이 찍은 DNA X-선 회절패턴 사진. 그러나 DNA 이중나선구조를 규명한 것은 Watson과 Crick. 과연 무엇이 성공과 살패를 갈랐는가? Bronowski는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Weisberg는 창의성이라고 바꿔서 불렀다. Bronowski가 쓴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여전히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브로노우스키가 401쪽에 게재한 사진을 바이스베르크는 자신의 저서 17쪽에 실었다. 브로노우스키가 한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마냥 찬사만 보낼 수 없다. 무리하게 과학과 예술 또는 과학과 시를 접목시키려고 하다보니 산업혁명을 말하는 부분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이런 부분은 책 곳곳에서 계속된다.

저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책 그 자체가 물리적으로 문제다. 360쪽짜리 책을 500쪽짜리 책으로 부풀리면서 그에 걸 맞는 종이를 사용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려면 책장을 넘기고 접어야 하는데 책이 접히지 않는다. 종이가 좀 더 얇았어야 한다. 너무 많은 사진과 그림이 오히려 독서를 방해한다. 판형을 키우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책을 읽지 않고 글자만 쳐다보고 있는 편집자가 문제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