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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구락부

북리뷰 《해석에 반대한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1. 도서 : 《해석에 반대한다》

Susan Sontag. 2013.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 요약

2-1. 해석에 반대한다

플라톤은 예술을 현실모방, 흉내라고 주장했다. 예술의 가치는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설파하고자 했다. 플라톤에게 예술은 특별히 유용하지도 않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도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한 플라톤의 견해에 맞섰다. 예술은 치료의 한 형태였다. 예술은 위험한 감정을 일으켰다가 그 감정을 정화하는 치유력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예술의 모방이론은 예술을 구상적(具象的)이라고 가정한다. 대부분의 예술가와 비평가가 예술은 외부의 현실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이론을 버리고 예술이 주관을 표현한 것이라는 이론을 택한 오늘날에도 모방이론의 주요 특징은 그대로다. 예술작품을 그림모델(현실을 예술가가 그린 것이 예술작품)로 이해하든 아니면 진술모델(예술가가 진술한 것이 예술작품)로 이해하든 여전히 내용이 우선이다.

예술의 내용을 과도하게 강조하다보면, 해석 작업을 해야만 한다. 결국 예술을 예술로 즐기지 못하고, 해석하기 위해 예술에 접근하게 된다. 예전의 해석방법은 원문 그 자체의 의미 위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해석방법은 파고 들어가면서 파괴한다.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해석은 해방행위다. 수정하고 재평가하면서 죽은 과거에서 탈출한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해석은 반동적이고 비열한 훼방이다.

훼방으로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난도질한다. 난도질은 예술작품을 특정한 내용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길들인다.

저자 수잔 선택 (Susan Sontag)

해석에 맞선 오늘날 예술은 해석에서 탈주하고자 한다. 추상미술은 일상적 의미를 담지 않음으로써 탈주하고자 한다. 내용이 없으니 당연 해석도 있을 수 없다. 팝아트는 보이는 그대로 뻔한내용을 쓴다. 결국 여기서도 해것의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면서 예술작품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비평은 어떤 것인가? 예술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내용에 관한 언급 안에 형식에 대한 언급을 녹여낸 비평은 최상의 비평이다. 또한 외형을 정확하고 예리하면서도 애정어리게 분석한 비평이 바람직한 비평이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석학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2-2. 스타일에 대하여

큐비즘 회화나 자코메티의 조각은 스타일화(stylization)가 아니다. 인간의 얼굴과 몸을 아무리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해도 그것이 얼굴과 몸을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리벨리(화풍이 다채롭고 화려하지만 지나친 장식과 섬세한 묘사로 사실성 상실)와 조르주 드 라 투르(명암의 대비, 인물의 기하학적 대치, 세련된 단채화법)의 그림들은 내가 말하는 스타일화의 본보기다. 스타일화는 스타일과 달리 제재에 대한 양가감정(호의와 모순되는 경멸, 아이러니와 모순되는 강박관념)을 반영한다. 결과는 예술작품이 지나치게 편협하고 반복적이 되거나 작품 곳곳에서 삐걱거리다 작품 자체가 분열되거나 둘 중 하나다. 스타일화된 예술의 엉뚱함이 우리에게 유효하고도 소중한 만족을 준다.

Carlo Crivelli (1430~1495) <성모자상> 성모 마리아 머리 맡에  있는 사과는 원죄를 상징한다. 반대편 오이는 그 원죄를 지은 성욕을 시각화하듯 남근을 닮았다. 아기 예수는 파를 처다 보고 있다. 성과 속의 경계 위에 앉아 있음을 깨우친다. 성화같지만 성화가 아니다. 성욕과 원죄를 생산한 마리아로 읽을 수도 있고, 성과 속의 경계에 선 예수를 지키기 위해 거룩한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는 성모로 읽을 수도 있다. 

예술작품의 고유한 특징은 작품 자체에 사로잡히거나 매료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참여·판단 등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얻는 지식은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의 형식, 즉 스타일에 대한 경험이지 어떤 것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실낙원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이유는 이 작품이 신과 인간에 대해 보여주는 견해 때문이 아니라, 그 시에 구현된 탁월한 에너지와 생명력·표현성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심미적으로만 접근해서도 안 되지만, 예술작품 속 상황을 실행활에서 맞닥뜨리는 행동을 대하듯 도덕적으로 대해서도 안 된다. 작품에서 내용에 함몰되는 태도는 원칙적으로 심미적 판단과 양립할 수 없다. 예술은 도적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 도덕적 쾌감은 어떤 행동을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주는 도덕적 쾌감이자 예술이 행하는 도덕적 역할이다. 예술이 도적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심미적 체험과 심미적 목적의 본질을 이루는 특성들이 삶에 대한 도덕적 반응에서도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 학자들과 비평가들이 수 세대에 걸쳐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본성, 도적과 사회에 관한 특정 견해를 끌어내 보려는 작업에 매달렸으나 헛물만 켜고 말았다. 예술작품이 말하는 바를 놓고 도덕적으로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예술작품을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것만큼이나 난데없는 일이다. 예술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만약 예술작품이 우리를 흥분시킨다면 그 흥분은 심미적 경험을 통해서 완화된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관조, 역동적인 관조를 일으킨다. 예술작품을 접하는 이가 작품 안에 있는 것을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실제 삶과 동일시하면서 자극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궁극적으로 분개나 찬동을 넘어서는 초연하고 평온하고 감정의 동요 없는 관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이 주는 희열은 인간 의식의 온갖 특성이나 양상을 경험하는 데에서 온다. 예술작품에 내용이 없다는 의미는 세계에 내용이 없다는 의미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둘 다 내용이 없다. 둘 다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 하려고 해봐야 할 수도 없다. 예술작품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반화시키지 않은 한 판단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것을 보여주거나 이해시켜주는 것이다. 판단하거나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 작품이 재현하는 실제 세계와의 일정한 거리를 토대로 삼는다. 이 거리란 정의상 어느 정도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거리다. 거리의 멀고 가까운 정도와 그 처리방식, 거리두기와 관련된 다양한 관례가 작품의 스타일이 된다. 예컨대 스타일이 곧 예술이 된다. 그리고 예술은 스타일화된 개인 감정의 요소를 제거한, 다양한 표현양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타일의 기능은 정신활동의 내용을 망각에서 보호하는 것이다(시를 예로 들자면, 운율·압운·대구 등을 사용하여 시인은 기억하고자 한다). 기술적으로 예술가의 스타일은 예술형식을 배치하는 고유한 어법이다. 스타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우리의 중의를 집중시킴으로써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행위다.

내가 지금까지 스타일에 관해 말한 것은 예술작품과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에 관한 일련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2-3. 하나의 문화와 새로운 감수성

과학문화와 인문문화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기계의 도래와 과학문화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문학자들은 수세에 몰렸다. 기껏해야 예술을 소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예술의 기능을 포기해 버렸다. 과학과 기술은 끊임없이 변하고 예술은 늘 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자동화된 과학사회에서 예술은 기능적이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다.

과연 그럴까?! 예술의 진보는 과학이나 기술과 다르게 이뤄진다. , 예술도 발전하고 변화한다. 우리시대의 예술은 갈수록 전문적 영역이 되고 있다. 물리학이나 공학에 통달하기까지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 못지않게 오랜 기간 고되게 감수성을 양성해야만 예술을 할 수 있다. 현대예술은 현대과학만큼 난해하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예술가들도 예술사에 관심을 갖는다.

이처럼 예술과 과학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두 문화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이 탄생하고 있다.

대량복제 시대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한다(과학문화 對 인문문화, 형식 對 내용, 경박한 것 對 진지한 것). 단 하나뿐인 것과 대량생산된 것 사이에 차이점을 평가하면서 나온 구분이다. 유일무이한 작품이거나 예술가가 손수 남긴 서명이 있다면 대량복제 시대에도 진지한 예술가의 작품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Susan Sontag은 C. P. Snow가 말한 '두 문화'에 대해서 반대한다. Walther Benjamin이 제기한 '기계복제 시대에 예술작품'이 맞이한 위기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Platon의 '모방이론'과 K. Marx의 '반영이론'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나는 Susan Sontag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지만, Susan Sontag만큼 대담한 비평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현대예술은 낭만적 기질에 반대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고집한다. 감상적인 것을 거부하고 정확성을 추구한다. 현대예술은 예술보다 과학정신에 더 가깝다. 예술은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어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예술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감수성은 비문학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활기 넘치는 예술은 내용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지도 않다. 현대예술은 예술작품이 지닌 고유한 특성에 집중한다. 반면에 문학이나 소설은 당대의 사회나 문화를 진단하는 텍스트로 문학작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짐과 부담을 모두 안고 있다.

예술작품은 그저 사상이나 도덕적 정서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예술작품은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을 조절해준다. 각 문화권은 어떤 감각을 중시하고 다른 감각을 억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이 등장한다. 관료제적 합리성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진지한 음악은 우리 귀를 괴롭게 한다. 새로운 미술은 우리 시각을 우아하게 보상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화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현대예술은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새로운 감수성은 예술에게 내용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는다. 형식과 스타일의 즐거움에 개방적이지만 딱히 교훈을 줄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운 감수성을 터득하면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 제스퍼 존스가 그린 그림, - 고다르의 영화, 비틀즈의 음악과 개성,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저자 수잔 선택 (Susan Sontag)

3. 리뷰 

독일 학계에서 일어난 과학철학 논쟁에서 두 문화론을 제기한 C. P. Snow를 비판한다. Walther Benjamin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급문화를 옹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여전히 플라톤의 모방으로서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수잔 선택은 자신의 예술관을 드러낸다.

3-1.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수잔 선택은 가장 미국적인 비평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이론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 예술비평에 반대한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52). 결국 수잔 선택에게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이념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그냥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예술은 모순적이고 퇴폐적이고 기괴하다.

현대 예술비평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예술의 내용을 과도하게 강조하다보면, 해석 작업을 해야만 한다. 결국 예술을 예술로 즐기지 못하고, 해석하기 위해 예술에 접근하게 된다”(22). 그런 예술은 가짜다. 예술작품은 그저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을 조절해준다”(448). 예술작품이 조절하는 우리 감정은 평온하고 조화롭고 교훈적인 것이 아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음악을 들으면 괴롭기만 하다. 새로운 미술을 보면 추악하다. 새로운 영화는 수용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이 예술은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모방이론에 대한 반대, 해석 작업에 대한 반대, 내용에 대한 반대, 스타일화에 대한 옹호를 통해 수잔 선택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3-2. 닥치고 감상

예술작품을 그냥 감상하고 즐기면 된다.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해석해 내려고 하는 순간 배는 산으로 간다. 이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예술작품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형식(외형)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분석한 비평이 바람직한 비평이다. 비평가가 예술작품 하나 놓고 시대정신이 어떻다는 둥, 예술가가 부도덕하다는 둥, 인간의 본성과 사회가 이러한 것이라는 둥 하기 시작하면, 그 비평가는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자기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파괴되고 예술가는 살기 위해 아무런 내용 없는 추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허튼 짓을 당장 멈추라!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주목하라!

3-3. 이 그림이 예술작품이다

크리벨리(화풍이 다채롭고 화려하지만 지나친 장식과 섬세한 묘사로 사실성 상실)와 조르주 드 라 투르(명암의 대비, 인물의 기하학적 대치, 세련된 단채화법)의 그림들은 내가 말하는 스타일화의 본보기다. 스타일화된 예술의 엉뚱함이 우리에게 유효하고도 소중한 만족을 준다”(43).

Georges de La Tour(1593~1652) <The Cheat with the Ace of Diamonds> 타짜는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바꿔치기 하고 있다 . 하녀는 시중을 드는 척하면서 상대편이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알려준다 . 아무것도 모르는 귀공자는 포커에 집중하고 있다

3-3. 그러나 나는 수잔 선택의 내용을 비판한다

동성애자들이 캠프의 전위세력을 구성하고 있다. 유대인과 동성애자는 현대 도시문화의 걸출한 창조적 소수집단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 감수성의 창조자들인 것이다. 유태인들의 도덕적 엄숙함, 동성애자들의 타비주의와 아이러니야말로 현대적 감수성을 개척한 양대세력이다”(434). 특정 민족이 창조적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사고 자체가 쇼비니즘적이다. 특희 박해 받고 대량학살 당했던 시대가 아니라 박해하고 대량학살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용감하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전했다. 기계복제를 통해 대량생산된 예술작품도 여전히 예술작품이라는 획기적인 주장으로 서구유럽 문화이론가들의 논쟁을 잠재웠다. 예술작품을 네 입맛대로 해석하지 말고 예술가를 길들이지 말라면서 뉴욕평단의 비평가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가장 미국적인 예술비평과 예술감상을 옹호함으로써 예술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맥락 없이 동성애와 유대인을 옹호함으로써 스스로 내용비평에 빠져든다. 수잔 선택의 예술관과 예술비평은 극단적으로 편협한 자기변명과 자민족중심주의로 흘러간다.

4. 평점 : 7.6점, 17권 중 8위

독서틀럽 삼락구락부 회원들은 매달 책을 한 권씩 읽고 토론했다. 수잔 선택이 쓴 《해석에 반대한다》는 삼락구락부 회원들이 읽고 평점을 부여한 책 17권 중에서 8위를 차지했다.
《해석에 반대한다》 평점 7.7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