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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기생충>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구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2020218()

 

<기생충> 아카데미 정복

2020210(현지 날짜 9)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6개 부분 후보에 올랐던 우리영화 <기생충>이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모두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도 존경해 마지않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누르고 감독상까지 수상한 쾌거다. 수상 다음 날인 11일부터 돼지슈퍼·스카이피자 등 영화촬영지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농심에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짜빠구리’(짜빠게티+너구리)를 컵라면으로 만들어서 미국 시장에 출시할 계획이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은 대구 두류공원에 봉준호 영화박물관을 짓고 대구를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도약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봉준호 감독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렸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한국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구리를 먹는 조여정. 영화로 인해 유명세를 타면서 짜파구리를 정식으로 출시했다.

전세계 언론은 기생충이 이룩한 성공신화를 해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봉준호가 만들면 새로운 장르가 된다. 형식을 혁신한데서 성공 원인을 찾는 분석이다. 부유한자와 가난한자를 대비시켜서 신자유주의시대를 몰입도 있게 그려낸다. 내용에서 그 이유를 찾은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영화계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이런 영화를 못 만든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달성한 대한민국에서 그 이유를 찾는 사회적인 분석이다. 장벽 쌓기에 혈세를 쏟아 붓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정치적인 분석이다.

2019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서 2020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한국영화 <기생충>

그러나 정작 한국영화 기생충의 성공에 놀란 것은 미국사람이나 전세계 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 자문한다. ? 한국영화가 미국 아카데미를 뒤흔드는 쾌거를 이룬 것은 단기간에 이룬 성과나 천재적인 영화인 몇 사람이 일군 기적이 아니다.

한국 첫 영화

우리나라 최초 상업영화는 19191027일 단성사에서 상영한 <의리적 구토>. 그래서 올 해는 한국영화 101년째 되는 해다. 관람객들이 초저녁부터 밀물처럼 몰려드는 대성황을 이루었지만 연극 속에 영화가 있는 활동사진 연쇄극에 불과했다(김종원·정중원. 2001: 46-56). 그렇다고 하찮은 시작은 아니다. 18951229일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그랑 카페에서 유료상영을 한 전세계 최초 상업영화에 비추어보더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상영한 영화 물에 젖은 물 뿌리는 사람이나 역에 도착하는 기차등은 단일 숏 촬영한 움직이는 스냅 사진에 불과했다. 길이도 1분을 넘지 않았다(Pearson, 2005: 36-42).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촬영상영인화기 시네마토그래프(오른쪽)와 최초의 영화포스터 ‘물에 젖은 물 뿌리는 사람’(왼쪽)

우리나라 첫 장편극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기획하고 윤백남이 1923년 제작한 <월하의 맹서>. 최초의 순수 조선영화 <심청전>을 윤백남 프로덕션이 만들어서 개봉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25년이다. 이명우 감독이 만든 우리나라 첫 발성영화 <춘향전>을 개봉한 것은 1935. 1923년 일본인 감독 하야카마 마쓰지로(早川孤舟)가 무성영화 <춘향전>을 만든 뒤 12년 만에 발성영화로 다시 만든 것이다. 미국에서 만든 첫 발성영화 <Jazz Singer>1927년에 개봉한 것에 비추어보더라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1928년부터 일제가 영화검열을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19401월에 일제가 공포한 조선영화령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영화에 대한 사형선고였다(최석호, 2006: 150-152).

한국영화 민주화

실질적인 재건이 이루어 진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주한미군 502부대가 보유한 최신 영화제작 장비와 이승만 정권의 한국영화 지원정책으로 고무된 자본이 영화에 집중된다. 1955 15편을 제작한데 이어서, 이듬해에는 42, 1957년에는 28편을 제작했고, 1958년부터는 매 년 1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다.

 

국민1인당 년가 영화관람횟수 1961년~1979년. 일제강점에 이어서 군부독재는 한국영화를 사양길로 몰아넣었다.

유신헌법 발효와 함께 또 다시 위기를 맞는다. 귄위주의 정부가 조국근대화 명제를 더욱 강요하면서 퇴행하기 시작한다. 한국영화는 또 다시 규율과 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고통은 계속된다. 1986년 미국은 한미통상협상을 벌이면서 한국영화시장에 개방 압력을 넣는다. 198771일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고 영화수입을 자유화한다. 19881월 미국 주요영화사는 UIP직배를 시작한다(최석호, 2006: 200-204). 1968년 일인당 연간 5.8회나 영화를 관람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하던 한국영화는 1976년에 2회 이하로 처음 떨어진데 이어서 1982년에는 최저 수준인 1.1회까지 떨어진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도 196850.29%를 고비로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87년에는 20%대로 하락하고 1992년에는 10%대까지 내려간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 1967년~1979년. 국민들은 한국영화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를 찬양하는 선전영화에 등을 돌렸다.

1993년 역사상 최초로 집권한 민선민간정부는 규제와 통제로 일관했던 영화법을 폐기하고 1996년 영화진흥법을 제정한다. 영화제작사에게 자율성을 보장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기 위한 법이다. 영화 소재제한을 철폐하고 검열제를 폐지함으로써 한국영화가 도약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완성한다. 복합상영관을 도입함으로써 영화시장을 혁신한다. 

한국영화 세계화

199611일 지적재산권의 무역적 측면에 관한 협정 시행에 따라 199771일 우리나라에서도 영화와 대중음악을 비롯한 문화생산물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전면 보장한다(최석호, 2006: 256-264). 지금은 지적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한국영화에 도움이 되지만 당시로서는 위기상황이었다. 같은 날 홍콩이 본토에 반환되면서 홍콩영화가 붕괴한다. 아시아 영화시장에 커다란 공백이 발생하면서 한국영화가 뻗어나갈 수 있는 시장을 얻는다.

 

국민1인당 영화관람횟수 1993년~2019년. 민주화와 세계화에 성공하면서 국민들은 다시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1993년 <서편제>가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다. 이후로 2003년 <실미도>(11,081,000), 2013년 <변호인>(11,374,610) 등 무수한 천 만 관객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2014년 <명량>(17,613,682)이 드디어 역대 최대 흥행을 기록한다. 성공한 영화들은 한 결 같이 한국·한국인·한국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인만 만들 수 있는 한국적인 정서를 형상화한 한국영화이기 때문이다. 지방화(localisation)는 세계화(globalisation)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세계화다. 따라서 성공한 한국영화는 세계화의 산물이다. 가장 한국적인 영화가 가장 세계적인 영화다.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반지하 월세방과 즐비한 계단에 늘어선 4층짜리 벽돌 빌라 그리고 치열한 일상 등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에 전세계가 빠져들고 있다.

 

관객점유율 1993년~2019년

한국영화 천 만 관객시대

2019년 한국영화는 697편을 개봉해서 우리 영화시장 51%를 점유했다. 미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4.37회 관람했다. 세계 최고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것보다 놀라운 기록이다. 근대화를 통해 일본과 미국의 앞선 영화제작기술을 터득했다. 민주화를 통해 소재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영화를 정권선전의 도구로 전락시킴으로써 한국영화 발목잡기에 급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진흥 정책을 펼쳤다. 관객들은 떠났던 극장으로 다시 가서 한국영화를 관람함으로써 국민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우수한 인력들이 영화제작에 뛰어들면서 잘 만든 한국영화가 쏟아졌다. 때마침 홍콩영화산업이 붕괴하면서 아시아영화시장을 석권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근대화·민주화·세계화를 거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일궜다. 101년째를 맞은 올 해 아카데미 최고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절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김지운에 놀라고 박찬욱에 감동할 날이 머지않았다.

 

참고문헌

 

김종원·정중원. 2001. 우리 영화 100현암사.

최석호. 2006. 한국사회와 한국여가 근대적 대중여가의 형성과 문명화한국학술정보.

한병국. 2002. 영화, 문화에서 산업으로삼정KPMG그룹.

Pearson, Roberts. 2005. “초창기 영화”. Geoffrey Nowell-Smith(ed.). 옥스퍼드 세계영화사(The Oxford History of World Cinema). 열린책들.

 

최석호 라이프 칼럼. 2020. "한국영화 기생충". <헤럴드경제> 2월 19일자 (ⓒ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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