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저자 조경달
조경달 교수는 195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사학자로 조선근대사를 전공했다. 주오(中央)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도쿄도립대학 인문학부 조교를 거쳐 현재 지바(千葉)대학 문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역사와 진실》(공저, 1997, 치쿠마쇼보), 《조선민중운동의 전개-士의 논리와 구제사상』(2002, 이와나미쇼텐),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식민지근대성론 비판》(2008, 유시샤), 《근대 조선과 일본》(2015, 열린책들), 《식민지 조선과 일본》(2015, 한양대학교출판부) 등이 있다.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2012년 제5회 녹두대상 수상자로 조경달 교수를 선정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분석 연구한 《이단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1998, 이와나미쇼텐)이라는 연구저서를 통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19세기 세계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민중운동이자 최대 최고 수준의 민중혁명'이었음을 실증해 냄으로써 국내외의 동학관련 연구자 및 일반인들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 수준을 크게 격상시키는데 기여한 공로가 높이 평가되어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 밖에 논문으로는 “갑오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 연구”(1983), “조선 근대의 내셔널리즘과 문명”(1991), “동학에 있어 정통과 이단”(1994), “대한제국기의 민중운동”(1995), “김옥균에서 신채호로-조선의 국가주의의 형성과 전회”(1996), “조선의 근대와 그 정치문화”(2003), “식민지 근대성론 비판서설”(2008) 등이 있다.
조선왕조와 일본
조선왕조는 건국이념을 주자학에 두었다. 정치이념은 유교적 민본주의였다. 맹자의 사상에서 규범을 찾았다. 권력주의적 패도를 배척하고 덕치주의적 왕도를 지향한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한다.
일본막부는 불안정한 전국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무위적 조치를 강구했다. 신분제를 엄격하게 하여 농민을 토지에 묶어놓는다. 도당을 금지하고 직업선택이나 여행을 금지한다. 밀정과 상호감시 시스템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세밀하게 규제한다. 사회의 모든 면에서 격식이 지배한다. 행정기구를 순식간에 군사조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영국가였다.
조선의식에는 일본형 화이의식이라고 불러야 할 우월의식이 존재했다. 일본형 화이의식이란 일본을 신국이라고 생각하고 무위(武威)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말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1869년 1월 31일 신정부는 쓰시마를 통하여 황정복고를 조선에 고지했다. 조선국왕을 격하하고 일본천황을 상위에 두었다. 조선은 서계 수리를 거부했다. 선린관계는 단절되었다. 일본은 그리 될 줄 알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은 애초부터 침략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조경달, 2015: 21~45).
대원군 정권
1863년 사쓰에이 전쟁과 1864년 시모노세키 포격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미국 포함외교에 허망하게 굴복한다.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이었던 국가를 지켰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항복하는 것쯤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태도는 일본을 근대로 전환하기에 용이한 사회적 조건이었다. 조선은 1866년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함대를 정족산성에서 물리쳤다. 1871년 강화도로 쳐들어온 미국 군함에 맞서 광성보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결국 미국도 물러갔다. 조선에서는 설령 국가가 망하더라도 도에 따라 죽는 것을 옳게 여겼다.
1873년 12월 14일과 22일 면암 최익현은 두 차례 상소를 올린다. 대원군은 실각하고 면암은 제주로 유배 간다. 12월 24일 고종은 서정친재(庶政親裁)를 선언한다. 1875년 1월 5일 폭사하기 전까지 병조판서 민승호는 민씨 척족정권을 장악한다. 만동묘를 부활하는 등 대원군이 시행했던 일련의 개혁을 되돌린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로 여행을 떠난다. 쓰시마 번 관할 초량왜관을 접수하고 1872년 9월 대일본공관으로 전환한다. 조·일간 긴장이 커진다. 일본 내부에서는 정한논쟁(征韓論爭)이 일어난다. 1875년 5월 25일 왜관에 파견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는 군함 파견을 요청한다.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1845~1929년) 소좌가 이끄는 운요호(雲揚號)와 다이니테보호(第2丁卯號)는 부산 앞바다에서 포격연습을 한다.
9월 20일 이노우에는 초지진에 접근하여 조선 수군의 포격을 유도한다. 9월 21일 초지진을 불태우고, 22일 군민 35명을 살해하고 영종진을 점령한 뒤, 28일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1876년 2월 10일 구로다 일행은 군함 6척에 4천 명 군인을 태우고 강화도에 나타난다. 미국의 포함외교를 답습한 위압외교의 일환이었다. 조선 내부에서는 일본이 위압외교에 분개했으나, 어전회의에서는 개항이 불가피하다는 논지가 대세를 이뤘다.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관에 조인한다(조경달, 2015: 49~70).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7세손으로 태어났으니 흥선대원군 이하응(石坡 李昰應, 1820~1898)은 그 지위가 남달랐다. 재주가 뛰어나서 감당 못할 일이 없었다.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대권을 잡았으니 운도 따랐다. 1863년 고종이 12살 때다. 그러나 공부가 짧았다.
1865년 8천만 냥을 들여서 경복궁을 시공하고 1867년 낙성했다. 1592년 임진난을 당하여 소실된 채로 방치되었던 궁이다. 대원군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제도를 안정시키고 재정을 풍부히 한 뒤에 할 일이었다.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의 근거지를 없애니 백성들이 흥선대원군의 현명한 결단을 칭송했다. 군포를 혁파하고 양반에게도 호포를 징수함으로써 오래 쌓인 폐막을 일거에 깨끗하게 했다. 환곡제도를 사창법으로 바꾸어 폐단을 고쳤다.
그러나 국가의 부강함은 백성의 부에서 나오는데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지위와 재주가 있었고 시운이 따랐지만 꼭 필요한 배움이 없었다. 조선의 아픈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박은식, 2012: 363~376).
임오군란
1876년 5월 23일부터 6월 19일까지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으로 간다. 일본인들은 시대착오적인 행렬을 꾸려서 에도로 가는 수신사를 모멸적인 호기심으로 지켜보면서 조소했다. 1880년 7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김홍집 일행은 재차 일본으로 간다. 김옥균(古均 金玉均, 1851~1894)이 사재를 털어서 보낸 조선 개화승 이동인(李東仁, ?~1881)과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을 만난다. 참찬관 황준헌이 쓴 《朝鮮策略》을 들고 귀국한다(조경달, 2015: 73~76).
“오늘날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어서, 미국과 이어짐으로써(親中結日聯美) 자강을 도모한다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 ··· 러시아에 병합되는 것을 막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사이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으려면, 미국과 이어지는 것은 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正爲防俄之倂呑 憚英法德意之挾 聯美國乃不得不亟亟哉)”(黃遵憲, 2001: 23, 40). 당시 청국 외교 최대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이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어서 조선책략은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위정척사파는 거세게 반발했다. 집단상소가 빗발쳤다.
1881년 1월 19일 삼군부를 폐지하고 청국을 본떠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다. 윤웅렬에게 지휘관을 맡기고 일본공사관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80명 규모로 별기군을 창설한다. 5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간 유길준과 유정수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윤치호가 도진샤(同人社)에 각각 유학하여 조선 최초 유학생이 된다. 1882년 2월 오군영을 무위영과 장위영으로 통합하고 긴축운영에 들어간다. 5월 22일 위홍장의 주선으로 인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세조항을 철폐함으로써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도 자동 삭제된다.
1882년 7월 23일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과 부패한 민씨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 경기도 관찰사 이최응 등을 살해한다. 민비는 궁에서 탈출하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년~1917) 일본공사는 일본으로 도망친다. 7월 25일 오군영과 삼군부를 부활하고 민씨척족을 죽인다. 대원군이 재집권한다. 8월 26일 김윤식과 어윤중은 청국에서 청의 진압을 요청한다. 청은 군함을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텐진 바오딩부에 유폐한다.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함께 귀국한 김옥균은 김윤식과 어윤중을 비난한다. 이 때 개화파는 개화의 속도와 방법 차이로 분열된다. 8월 30일 개인배상 5만 엔, 국가배상 50만 엔, 일본공사관 자체 경호, 양화진 개시, 일본상인 활동영역 50리로 확장, 일본외교관 내지 자유여행 등을 적시한 제물포조약을 맺고 임오군란은 일단락된다.
1882년 10월 4일 “조선은 오래 동안 번방이었음”을 적시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다. 1886년 6월 조불수호통상조약에 교회라는 낱말을 삽입함으로써 사실상 기독교선교를 인정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적으로 청국을 지도해야 한다는 동양맹주론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청국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선회한다. 그러나 일본 내부 사정은 자유민권운동이 전성기에 도달하면서 배상금을 소액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영토할양이나 반란군 처벌 등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다. 구미에 굴종하면서 아시아에 강경한 일본 정부를 비판한 아시아주의적 관점이다(조경달, 2015: 76~92).
1883년 일본 판리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한성에 와서 제물포조약 제5조에 따라 공관을 지키는 수비병 2백 명을 둔다. 청국도 원세개·황사림·마건충 등에 명하여 군인 2천 명을 하도감에 머무르게 한다(박은식, 2012: 390).
갑신정변
1883년 1월 정치고문 마건상과 묄렌도르프가 지도해 준 바와 같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신설한다. 두 아문에 개화파를 중용한다. 오장경 제독은 청국군을 지휘하고 원세개는 좌영·우영·전영·후영 등 4영 체제를 갖춘 신건친궁영을 신식무기로 조련한다. 각 영의 대장은 비개화파가 맡았다
김옥균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참의로서 박문국을 신설하고 <한성순보>를 발행하는데 힘을 기울여서 10월에 발행한다. 묄렌도르프가 주창한 당오전 발행을 논박한다.
1883년 2월 철종의 사위 금릉위 박영효가 한성부윤이 되면서 치도국·순경국 등을 설치하여 한성을 근대도시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도야마군사학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식군대 창설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4월 광주유수로 좌천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김옥균도 동남제도개척사겸포경사로 좌천된다. 당오전 발행 폐해를 막고자 6월 외채 300만 엔을 모집하기 위해 고종의 신임장을 지참하고 일본으로 간다. 민승호 암살 이후 민비의 신망을 한 몸에 받은 민영익은 7월 홍영식·서광범 등과 함께 보빙사로 미국에 간다. 아더 대통령을 알현하고 미군 군함에 탑승하여 구미 각국을 둘러본다. 한편 김옥균은 조선주재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방해책동으로 외채를 얻지 못하고 1884년 5월 귀국한다.
민씨척족의 견제를 받고 개화파가 밀려날 지경에 놓인다. 갑신정변을 준비한다. 그러나 자신을 방해하는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일본공사관 병력을 의지하는 우를 범한다. 또한 일본 군함을 요청함으로써 자주독립을 한다면서 외국군대에 의존하는 우를 범한다. 당연한 결과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나고 김옥균은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 내에 자유민권운동은 위기를 맞는다. 자유당은 급진파에 밀려서 1884년 10월 해산한다. 아시아주의 역시 바닥을 친다. 1884년 12월 30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2개 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다. 1월 9일 한성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개입한 사실은 불문에 부치고 배상금 10만 엔만 챙긴다. 1885년 4월 18일 이토 히로부미는 톈진에서 이홍장과 협의를 통하여 톄진조약을 체결한다. 청·일 양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고, 파병할 경우 사전에 통지하기로 약조한다. 이후 조선에서는 1893년 7월까지 외국군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1885년 4월 15일 영국은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거한다.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행동이다. 만약에 대비해 블라디보스톡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갖춘 것이다. 6월 10일 스페이에르는 한성을 방문한다. 러시아세력을 이용하여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인아거청(引俄拒淸)의 일환으로 러시아에 부동항을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윤식의 반대에 부딪혀 7월 7일 결국 한성을 떠난다. 10월 3일 이홍장은 인아거청을 추진하고 있는 고종과 민비를 견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킨다.
1886년 8월 고종과 민비는 다시 한 번 인아거청을 시도한다. 러시아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국을 거문도에서 철수시키고 다른 나라와 조선의 평등한 관계를 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1887년 2월 27일 러시아는 조선의 어떤 지점도 점령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고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한다. 이로써 두 차례에 걸친 조러밀약사건은 무위로 끝난다(조경달, 2015: 95~116).
갑오농민전쟁
1885년부터 외국인 내지여행을 허용한다. 일본상인들은 봄에 나가서 미리 쌀을 사들인다. 입도선매 때문에 미곡거래는 투기성이 강해졌다. 빈농은 더욱 궁핍해졌다. 민씨척족정권 하에서 매관매직이 성행한다. 매관매직으로 부임한 지방관은 민중수탈에 열을 올린다. 게다가 진휼기능까지 약화되면서 민란이 격화된다. 1880년~1893년 사이에 52차례 민란이 일어난다. 그중 절반은 1890년~1893년 단 4년 동안 일어난다.
1864년 4월 15일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를 처형했다. 1871년 문경에서 동학교도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쉽게 진압했지만 1892년 10월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3월 복합상소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1만 명이 상경하는 사건을 계기로 양상은 달라진다. 4월과 5월 충청도 보은집회와 전라도 금구집회를 열면서 남접과 북접으로 갈린다.
1894년 4월 25일 전봉준이 무장봉기한다. 5월 11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한데 이어서 5월 27일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도 격파하고 5월 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한다. 6월 1일 정부군은 완산에 진을 치고 포격을 개시한다. 아울러 청국에 출병을 요청한다. 청군은 6월 8일 아산에 상륙한다. 6월 11일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은 철수한다. 농번기가 임박한데다 청일 외국군대가 조선에 주둔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6월 25일 청국은 1차 2천8백 명 파병을 완료한다. 강경파가 일본 내 여론을 주도하는 가운데 1894년 3월 28일 민씨척족의 뜻을 수용한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한다. 명분 없는 전쟁을 꺼리던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강경파 여론을 등에 엎고 동학농민전쟁으로 거류민 보호 명분을 확보한다.
6월 10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일본군 400명을 이끌고 한성에 진입한다. 15일과 16일 양일간 8천 명 혼성여단이 인천에 상륙한다.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다. 민씨척족정권을 붕괴시킨다. 7월 25일 풍도에서 청국군을 공격한다. 7월 29일과 30일 성환과 아산에서 청군을 격파한다. 8월 1일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다. 8월 26일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을 맺고 경인·경부 철도부설권과 전신권을 획득한다. 내정간섭을 합법화한다. 8월 27일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친일개화파정권을 수립한다. 9월 15일과 16일 평양전투에서 청군을 누른데 이어서 9월 17일 북양함대를 궤멸시키고 황해해전에서도 승리한다.
12월 4일에서 7일 나흘 동안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조선군 연합군에게 참패한다. 12월 28일 순창 피로리에서 전봉준을 체포한다. 1895년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한다. 4월 23일 전봉준 사형 판결을 내린다.
갑오동학농민전쟁은 획기적인 민중운동이다. 전봉준은 충군애국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민중자치를 실현했다. 민중은 민족주의로 무장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근대적 민족주의가 아니다. 근대 일본은 해외에서 최초로 민중대학살을 자행했다.
1896년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공포한다. 반일·반제투쟁에 나선 의병 봉기는 1896년 1월 원주, 2월 영월·제천·평창 등으로 확대한다. 유인석을 의병장에 추대한다. 4월 나주에서는 친일관리가 아니라 개화파관리를 살해한다. 동학 잔당이 합류했기 때문이다(조경달, 2015: 121~159).
대한제국
1896년 2월 11일 박정양·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친러파정권을 수립하고 23부제를 13도제로 개편한다. 세무시찰관을 폐지하고 관찰사·군수에게 징세권을 돌려줌으로써 개혁에 역행하는 수구정권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5월 유인석 부대가 충주에서 패퇴하면서 의병운동도 사그라진다. 1897년 4월 12일 단발령을 취소한다(조경달, 2015: 159~160).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1896년 갑오개혁을 일본 주도로 시행하면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제정했었다. 1897년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다.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12일 황제에 오른다.
1896년 4월 7일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발행한데 이어서 7월 2일 독립협회를 결성한다. 갑오개혁의 개혁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정동구락부가 주도한 근대적 정치결사다. 모화관에 독립관 간판을 내걸고 영은문을 부수어 독립문을 만들고자 했다. 1897년 8월 독립관에서 개회하기 시작한 토론회를 만민공동회로 확대하여 종로통에서 개최한다. 1898년 3월 10일과 12일 각각 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주로 러시아를 표적 삼는다. 러시아는 만민공동회에 무릎 꿇고 러시아 재정·군사 고문 해고, 한러은행 폐쇄, 절영도 조차 철회 등 요구사항을 수용한다. 정부 대신에게도 화살을 겨눈다. 내장원경 이용익의 민중수탈을 규탄하고 수구파 7대신을 규탄한다. 이용익을 귀양 보내고, 7대신을 파면한다.
그러나 고종은 중추원 고문 서재필을 해고하고 5월 14일 국외로 추방한다. 서재필이 창간하여 주필을 맡았던 독립신문을 윤치호가 인수한다. 독립협회 새로운 수장이 된 윤치호는 1898년 10월 29일 관민공동회를 열어서 고종의 조치에 맞선다. 수구파 조병식은 독립협회가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려고 한다는 거짓말을 유포한다. 11월 5일 박정양 내각은 붕괴한다. 이어서 조병식과 민종묵이 주도하는 수구파 내각을 구성한다. 11월 21일 길영수·홍종우 등 어용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실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12월 23일 고종은 만민공동회에 군대를 투입하여 강제로 해산한다. 25일 민회금압령을 내린다. 1899년 1월 독립협회는 결국 해산한다.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 금본위제, 중앙은행 설립 등 광무개혁을 추진한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의 차관 방해로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근대적 육군 창설을 위해 37.63%나 되는 국가예산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1만5440명 수준으로 유지한다. 부산·원산·인천 등의 경우 강제개항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목포·군산·진남포·마산·성진 등을 자주적으로 개항함으로써 각국 공동거류지를 만든다. 국가간 상호견제를 통해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조경달, 2015: 163~193).
러일전쟁
1894년 1월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이에 맞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러시아와 일본은 토지 매수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한다. 1899년 마산포 주변 토지 매수를 둘러싼 대립은 러시아가 양보하면서 일단락된다. 마산포는 일본군 상륙 용지다. 러시아가 1903년 압록강 하구 용암포 토지를 매수해서 삼림사업을 한다. 일본군 만주진출을 막고자 친 일종의 방어선이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한다(조경달, 2015: 197~199).
8일 뤼순항 바깥에 있던 러시아군함 카레에츠호를 공격한다. 9일 제물포로 피항한 카레에츠호와 정박한 바략호를 공격한다. 각각 자침·자폭한다. 10일 뒤늦게 전쟁을 선언한다(최석호, 2018: 118~122).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다. 3월 10일 주차대를 주차군으로 교체편성하여 9천명에서 단계적으로 2만8천명으로 늘린다. 한국병합 전에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조선은 러·일 모두 경계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했다. 1905년 3월 일본 경시청은 한국경찰을 감독하고, 군율로 일본군 군용지를 수용한다. 철도 인부를 징용하여 1천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경부철도와 경의철도를 1905년 1월과 1906년 4월에 각각 개통한다(조경달, 2015: 200~220).
국권회복운동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대리전쟁이었다. 일본 배후에는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 배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각각 도사리고 있었다. 1905년 5월 27일에서 29일 사이에 벌어진 동해해전에서 일본은 겨우 승기를 잡는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도발한 전쟁이다. 일본은 곧 바로 열강의 승인을 받아내는 단계로 나아간다. 7월 27일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의 필리핀 통치권을 인정하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인정),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고 조선 보호국화 인정), 9월 5일 포츠머스조약(러시아로부터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인정) 등을 체결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보호국화에 나선다. 고종은 밀사외교로 보호국화를 저지하고자 한다. 1905년 8월 17일 이용익을 프랑스·독일·러시아 등지로 파견한다. 10월에는 프랑스어 교사 마르켈에게도 밀서를 주어 러시아와 프랑스로 보낸다. 미국어 교사 헐버트와 전 공사 알렌에게도 워싱턴 중재를 요청하게 한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조선 국내법 중추원관제를 무시하고 강제로 체결한 것이다. 국제법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약이다.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된다. 외교권을 상실했다. 내정권도 반쯤 상실했다. 이사청을 설치하고 이사청경찰로 하여금 한국경찰 위에 군림하도록 한다. 1906년 7월 13일 부동산범조사회를 만들고 토지조사를 시작한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한제국 황실 소유 토지를 국유화하여 빼앗는다.
다시 의병이 일어난다. 1906년 5월 11일 예조참판 민종식은 의병을 일으켜 충남 남포를 습격하고 홍주로 진군하여 헌병과 일본거류민을 몰아낸다. 6월 4일 최익현 부대는 태인에서 봉기하여 11일 친위대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일본군이 아닌 한국군이 출동하자 의병을 해산한다. 동족상잔을 막기 위한 선택이다. 대마도에 억류된채 왜적 쌀 먹기를 거부하고 12월 30일 굶주린 채 순국한다. 장성 기우만, 임실 강재천, 경북 정환직·정용기 부자, 일월산 신돌석 등 의병 봉기는 줄을 잇는다.
주로 유림과 민중이 의병을 일으켰다면 도회지 지식인들은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다.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1905년 5월 24일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헌정연구회를 1906년 4월 14일 대한자강회가 계승하여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이후 서북학회·기호학회·호남학회·관동학회 등 계몽단체를 결성한다. 1907년 1월 13일 대구지역 출판사 광문사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차관 1천300만 엔을 갚고자 하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인 참여를 끌어낸다.
1907년 6월 24일 고종이 파견한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장 입구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활발한 외교전을 펼쳐서 현지 언론의 대서특필을 유도한다. 7월 8일 열린 언론인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로 일본의 부도덕함을 호소함으로써 각국 신문에 게재되는 성과를 올린다. 이토 히로부미 밀사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힐책하고 이완용을 협박한다. 7월 20일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한다. 한성과 평양에서 상인들은 철시한다. 도성백성들은 을사오적 이완용·이지용·이근용 등의 집을 불태운다. 시위대 병사 40명은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1907년 7월 24일 이토 히로부미는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한다. 조선병합에 반대하고 조선자치육성을 통한 일한제휴를 추진한 것이다. 병합할 경우 과도한 군비지출이 불가피하다. 조선통치 자체를 군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치를 육성하면 적은 비용으로 일본의 심복이 될 지배계층을 대리로 내세워 통치할 수 있다. 통감내정지도권, 입법행정 통감동의권, 경찰권 등을 장악한다. 법령 제정과 시행, 관리 임면 등에 통감 동의를 받도록 했다. 일본인 고문은 한국 관리가 된다. 내각에 일본인 차관을 배치한다. 고문경찰과 이사청결찰을 폐지하고 일본인 경찰관은 모두 한국경찰관이 된다. 황성수비대 1개 대대만 남겨두고 한국군 8426명을 해산한다.
시위대는 무기고를 탈취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다. 8월 6일 원주 반란군 1천600명 반란군이 시위대를 격파한다. 8월 9일 강화도 반란군 600명은 일진회원 군수를 죽이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시위대와 반란군은 모두 의병이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자치육성 정책은 강력한 조선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실패한다. 순종을 대동하고 1909년 1월 2일부터 2월 3일까지 남북순행에 나선다. 의병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반일운동만 초래한다. 부산에서는 4천명 결사대가 60척 배에 나눠 타고 순종이 승선한 군함을 에워싼다. 마산에서는 군중들이 격노하면서 이토 히로부미 연설이 중단된다. 개성과 평양에서는 한국과 일본 국기 교차 게양을 거부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날 결심을 한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남한대토벌 작전을 벌인다. 의병을 서남도서부로 몰아간다. 갑오농민군 궤멸을 답습하고자 한 것이다. 의병 2천명을 사상·포로·투항시킨다. 1911년까지 의병 1만 7779명을 죽인다. 3706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2139명을 포로로 잡는다. 일본군 희생은 사망 136명, 부상 277명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민족해방운동을 정의로 인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면 외국으로부터 무기원조를 받으면서 정기전으로 갔을 것이다(조경달, 2015: 223~271). 러시아도 의병에게 무기를 원조했더라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한국병합
순행에 실패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4월 10일 가쓰라 다로 수상과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제안한 한국병합안을 승인하고 6월 14일 통감을 사임한다.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법부와 군부를 폐지하게 한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은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시영 6형제와 양기탁·이동녕·이상룡 등은 사재를 털어서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한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한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등 실력양성운동을 펼친 것이다. 1909년 9월 4일 일본은 청국과 간도협약(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는다. 청국은 일본의 만주 권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청국의 간도영유권을 승인한 것이다.
일본은 간도문제로 미국 등 열강이 일본의 조선지배에 참견해 들어오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한국을 병합하여 일본과 일체화함으로써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1909년 2월 일본은 각의에서 한국병합을 결정한다. 1910년 5월 3일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제3대 통감이 된다. 통감부를 총독부로 바꾸고 총독에 취임하여 한국병합을 추진한다. 대한제국을 조선이라 고쳐부른다. 7월 4일 제2차 러일협약을 맺고 러시아로부터 한국병합을 승인받는다. 7월 6일 각국에 한국병합을 통지한다. 영국의 승인을 받고 미국의 침묵을 확신한다.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비밀에 붙인다. 병합과 동시에 조선귀족령을 실시하여 76명을 귀족에 포함시킨다. 한규설·유길준 등은 작위를 거부했다. 양반유생 9811명에게 경로금을 지급한다. 부정을 저지른 지방관을 사면한다. 민중의 미납세금을 면제하고 지세를 4/5로 감면한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 진수성찬을 먹은 것이다.
그 날 도쿄에서는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었다. 궁성을 참배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만세로 환호했다. 역사학자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한국병합을 “아득한 고대에 분가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을 본가인 일본이 인수했다”고 말했다.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에게 한국병합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계승한 것이었다.
1910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한 뒤 “천주님 드디어 포학자를 죽였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남한대토벌을 자행한 이토 히로부미를 의병 참모중장 안중근이 사살한 것이다. 마지막 정규전이다. 안중근의 당당한 모습에서 일본인들은 막부 말기 양이운동을 벌인 자신을 보았다.
언론은 한국병합보다 먼저 열강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떠든다. 수상은 한국합방운동을 규제한다. 기독교인들과 미션스쿨학생들이 벌인 일진회 반대운동이 한국민 전체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1911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한다. 비가 내렸다. <지지신보>(時事新報)는 “하늘 또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유교적 민본주의는 식민지 조선에 새로운 갈등을 예고했다(조경달, 2015: 175~296).
비판적 책읽기
짧은 분량으로 명쾌하게 선린관계 단절에서 한국병합까지를 기술하였다. 불필요하게 감정을 낭비하고 구구절절하기까지 한 여타 역사서와 차별화된다. 중요한 역사적 과정과 사건을 기술할 때마다 일본인들이나 일본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기술방식이다.
조경달은 자신의 관점에서 개화파를 비판하기도 하고, 식민사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도 한다. 반면 갑오농민전쟁을 높이 산다. 종교운동으로 폄하되는 것을 우려한 탓인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우리 사학자들이 기술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했던 민중사라는 관점에서 본 근대사를 드디어 펴낸 느낌이다.
몇 가지 거슬리는 점도 보인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 이상설·이준·이위종 등이 들어가지 못한 것을 정식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조경달, 2015: 242). 그렇지 않다.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았으나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최석호, 2018).
또한 고종 황제가 만민공동회에 직접 나와서 독립협회 활동을 허가하고 헌의6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술하면서 사료로 《大韓季年史》 上권을 제시하고 있다(조경달, 2015: 177). 저자 정교(鄭喬, 1856~1925)는 애국계몽운동가로 독립협회 핵심인물이기에 적절한 인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교의 가계나 학문적 연원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쓴 《大韓季年史》는 개인의 사적인 기록인지라 연도나 기술 내용이 틀린 경우가 많다. 번역서는 모두 10권인데, 그 중 제10권은 정오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제우라는 사람이 사악한 도로써 동학이라 이름하여 사람을 불러 모았다”고 기술하고 동학교도를 “도둑의 무리”라 칭하는 등 편향된 시각을 그대로 들어내기도 한다(정교, 2004: 198~201). 사학자가 쓴 역사서에서 사료로 제시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참고문헌
김옥균·박영효·서재필. 2006. 《갑신정변 회고록》 건국대학교출판부.
박은식. 2012. 《한국통사》 동서문화사.
정교. 2004. 《大韓季年史》 소명출판.
조경달. 2015. 《근대 조선과 일본》 열린책들.
최석호. 2018. 《골목길 역사산책 - 개항도시편》 시루.
黃遵憲. 2001. 《朝鮮策略》 조일문 역주. 건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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