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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구락부

병인양요 그 날의 기억

역사산책자 석호필  202161()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나에게 여가생활은 일보다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우리는 생애주기를 거친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선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의지한 성장기, 사회를 구성하는 어엿한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는 청년기, 정력적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장년기, 한 발 물러나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생도 변하고 여가도 변한다.

나는 요즘 삼락구락부에 푹 빠져있다. 걷기여행, 미식기행, 독서토론 등을 인생삼락으로 여기는 동호회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걷기여행과 미식기행을 못한지가 꽤 된다. 매달 한차례 독서토론만 하고 있다. 지난 달 6일 저녁 줌으로 재일동포 조경달 교수가 쓴 근대 조선과 일본을 읽고 토론했다. 동호회 회원 한 분이 소설가 K씨가 쓴 글을 인용하면서 독서토론이 다소간 소란스러웠다.

소설가 K씨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병인양요 정족산성전투는 서구제국주의 침략군과 싸워 유일하게 이긴 싸움이다. 양헌수 유장이 거느린 미륵뫼총댕이 400여 명이 올리비에 대령이 거느리고 온 법국 특공대 150명 가운데 140명을 몰살시켰다. 올리비에 대령도 사살했다.”

과연 그럴까? 병인양요 정족산성전투 그날로 다시 돌아가 보자!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18661011일 체푸(之罘, 현재 지명은 옌타이)를 출항하여 1016일 강화성을 점령한다. 전투는 없었다. 조선군은 모두 도망쳤다. 프랑스 신부 살해를 빌미로 책임자 처벌과 통상조약 초안 작성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군함 7척에 향도(嚮導) 및 통역 리델 신부와 수로안내 조선 천주교신자 3명을 포함한 장병 1천명 규모다. 강화성을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했다. 추수기에 서울로 들어가는 뱃길을 막음으로써 농산물을 비롯한 생필품 공급을 차단한 것이다. 조선 수도 서울은 굶주리게 함으로써 큰 충격을 줄 심산이었다(Roze, 1866a: 233).

강화성 남문. 프랑스 해군 로즈 제독이 1866년 조선을 침략했다. 10월 16일 강화성 남문으로 들어가서 한강을 봉쇄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강화성을 되찾기 위해 금위영에 순무영을 설치한다. 대장 이경하, 순무중군 이용희, 천총 양헌수. 1017일 대원군이 양화진으로 직접 나와서 출정군을 독려하는 가운데 순무중군과 천총이 출정길에 오른다.

1026일 문수산성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로즈 제독이 본국 장관에게 보낸 병인양요 보고서에 따르면, 뚜아르(Thouars) 대위가 2개 분대를 인솔하고 문수산성을 정찰하려고 나섰다. 배에서 내리기 직전 해안 15미터~20미터 지점에 다가가자 조선군이 공격했다. 배에 타고 있던 3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즈 제독이 급히 상륙하였을 때 조선군은 이미 산꼭대기로 달아나버린 뒤였다(Roze, 1866b: 244).

쥐베르가 그린 문수산성전투 기록화. 한성근 부대가 뚜아르 대위 2개 분대를 공격하고 있다. 프랑스군 여러 명이 죽고, 우리군은 4명이 전사했다(Zuber, Jean Henri. 2010.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유소연 역. 살림. 102쪽~103쪽).

같은 전투를 기록한 양헌수 천총의 병인일기에 따르면, 한성근이 먼저 대포(大碗口) 2발을 쏘아서 적 몇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많은 적들이 몰려들면서 조선포수 4명이 죽었다. 한성근과 포수들은 적에게 패해서 도망쳤다. 중과부적이었다. 적이 추격해왔다. 갑자기 안개가 산허리를 뒤덮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철수했다. 왕령이 보살폈다(梁憲洙, 1866: 106).

115일 양헌수 천총은 지형정찰 중 정족산성을 발견한다. 117일 해진 뒤 강을 건너가기 위해 덕포나루 부래도에서 점병했다. 병졸을 헤아렸다는 뜻이다. 승선하라고 명령했지만 아무도 배에 오르지 않았다. 향포수들은 전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오합지졸이었다. 칼을 빼들고 일갈한다. 배를 타려니 겁나는가! 비겁한 병졸은 10만이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모두들 가라. 내 장차 홀로 건너가겠다.” 그제서야 승선하기 시작한다. 얼마가지 않아서 누군가가 배를 돌리라고 외친다. 도착 지점 산기슭에 프랑스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양헌수 천총이 다시 외친다. “저놈을 당장 잡아와라. 배를 되돌린다면 내 손으로 모조리 참하리라!” 우여곡절 끝에 정족산성에 도착해서 점병했다. 하룻밤 사이에 세 차례로 나눠서 강을 건너면서 두 차례 점병했다. 18명이 총과 북을 버리고 도망갔다. 양헌수 천총은 이 모든 사실을 병인일기에 적었다(梁憲洙, 1866: 563~567).

119일 초관 김기명이 포수 161명을 거느리고 남문에 매복하고, 이렴이 150명을 거느리고 동문에 매복, 이대흥이 경군 101명과 향군 56명을 거느리고 서문과 북문 두 문을 나누어 지켰다.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육전대 150명을 아무 것도 모른 채 산기슭을 오르더니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동문 포수 이완보가 먼저 적 1명을 명중시켰다. 일제히 쏘기 시작하니 산악이 진동한다. 동문과 남문에서 6명을 죽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약환(탄환)이 떨어졌다. 아군은 모두 실색했다. 양헌수 천총도 칼을 던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적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100보쯤 추격하다가 숨이 차서 되돌아왔다. 전투 직후 백성들이 보고하기를 프랑스 육전대는 강화성으로 되돌아 가던 중 “5리쯤에서 10명이 죽고 20리쯤에서 60~70명가량 죽었다(五里二而者死十餘十里而死二十里而死者假量爲六七十)”(梁憲洙, 1866: 569). 종합하면, 프랑스군은 최소 76명에서 최대 86명이 사망했다. 우리군은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梁憲洙, 1866: 567~571).

물론 올리비에 대령은 죽지 않았다. 이튿날 바로 로즈 제독에게 정족산성전투 보고서를 제출했다. 4개 분대 150명을 이끌고 4시간동안 18킬로미터를 걸어서 오전 11시 전등사 산기슭에 도착했다. 정족산성에 조선군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300~400미터 지점에서 정지하고 2개 소부대를 보내서 정찰하게 했다. 산기슭을 타고 성벽으로 접근할 무렵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프랑스군 6명이 부상을 입었다(Roze, 1866: 246).

조선군이 성벽에 가득했다. 조선군 화승총 유효사거리를 벗어난 500미터 지점에서 전투를 지속했다. 부상자를 오두막으로 운반했다. 30분 동안 지속된 전투에서 29명이 부상당했다. 탄약이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1킬로미터 떨어진 단구지대로 후퇴했다. 조선군 추격병을 기병총으로 공격했다. 조선군도 화승총을 쏘았으나 우리에게 미치지 못했다. 전사자는 없었고 무기는 모두 회수했다.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군사 500명과 포병 1개 중대가 있어야 한다. 프랑스군은 대포 4문이 있지만 운반수단이 없어서 못 가지고 갔다. 조선군은 서울에서 보낸 정규군 1200명 정도 되는 것 같다(Olivier, 1866: 238~241).

오후 1시부터 5시간을 걸어서 강화성으로 복귀했다. 부상자가 있었기 때문에 갈 때보다 1시간 더 걸렸다. 아침 일찍 출정해서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도망치듯이 또 다시 18킬로미터를 걸었다. 조선군은 1200명이나 된다고 적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패배를 합리화하고 있다.

1110일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약탈·방화한다. 갑곶진에 집결한다. 양헌수 천총은 강화성에 입성한다. 1118일 프랑스함대는 작약도에서 출항하여 아산만으로 간다. 11217척 모두 회항한다.

강화성 외규장각. 정족산성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고 강화성 곳곳을 방화한 뒤 도망쳤다. 강화성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의궤를 훔쳐갔다.

나는 소설가 K씨에게 사료의 내용을 전달하고 다시 질문했다. 답장이 왔다.

양헌수 장군은 문집 하거집가운데 출전일기에 정족산성싸움을 자세히 기록했다. 백과사전과 한국사에 나온 기록은 죄 왜인들 것을 보고 적은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로 받드는 조선말 하는 왜노들이 역사학계를 틀어쥔 8·15직후부터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양헌수 천총이 1866년 병인양요 최선봉장으로 출정하면서 59일 동안 일기를 적는다. “丙寅日記. 양헌수 천총이 73세로 유명을 달리한 1886년 문집 荷居集을 발간한다. 1에 있는 격문의 부록에 出戰日記라는 제목으로 병인일기를 포함시켰다. 내용은 동일하다. 단 한 군데 정족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프랑스군인 숫자만 다르다. “20리쯤 가다가 120~30명가량 죽었다(五里二而者死十餘十里而死二十里而死者假量爲百二三十)”(梁憲洙, 1886: 81). 양헌수 천총이 쓴 병인일기에 76명에서 86명이었던 프랑스군인 사망자 숫자가 문집에서는 136명에서 146명으로 늘어난다. 20년 지난 다음에 기록한 것보다 20년 전 당시에 기록한 것이 맞다. 후손이 정리한 것보다는 본인이 기록한 것이 맞다. 당시 전투에 있었던 리델의 기록도 병인일기와 일치한다. 두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당연히 병인일기가 맞다.

이리하여 나는 극우반공이데올로기 신자가 되었다. 역사학계를 틀어 쥔 조선말을 쓰는 왜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극우 일본역사학자들이 저지른 역사왜곡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솔직해야 한다.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참고문헌

 

김원모. 2004. “병인양요”. 김유택 외. 향맥 제15- 忠莊公梁憲洙大將遺輯양평문화원.

梁憲洙. 1866. “丙寅日記”. 서인한 외. 1997. 군사사연구자료집 제5荷居集 丙寅日記국방군사연구소.

梁憲洙. 1886. “檄 討洋舶都主檄 附 出戰日記”. 荷居集 卷1서인한 외. 1997. 군사사연구자료집 제5荷居集 丙寅日記국방군사연구소.

연갑수. 2001. 대원군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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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2010. “마르탱의 1866년 조선 원정”. Zuber, Jean Henri. 2010.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유소연 역. 살림.

Olivier. 1866. 11. 10. “Roze 제독에게 보낸 정족산성전투 보고서”. Archives des Ministѐre des Affaires Estrangerѐ & Archives Nationales Marines. 1979. “韓佛關係資料 1866~1867 丙寅洋擾”. 교회사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역. 한국교회사연구소.

Ridel, Felix Clair. 2010.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유소연 역. 살림.

Roze. 1866a. 10. 22. “장관에게 보낸 강화 정박 보고서”. Archives des Ministѐre des Affaires Estrangerѐ & Archives Nationales Marines. 1979. “韓佛關係資料 1866~1867 丙寅洋擾”. 교회사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역. 한국교회사연구소.

Roze. 1866b. 11. 17. “장관에게 보낸 병인양요 보고서”. Archives des Ministѐre des Affaires Estrangerѐ & Archives Nationales Marines. 1979. “韓佛關係資料 1866~1867 丙寅洋擾”. 교회사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역. 한국교회사연구소.

Zuber, Jean Henri. 2010.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유소연 역. 살림.